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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ind

 

 

승자에게 쏟아지는 박수 갈채야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일이지만, 때로 패자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게 되는 때가 있다. 하찮고, 보잘것없고, 무력한 것들은 늘 패배한다.

 

어리석은 토끼는 동화에서나 있는 이야기이다
photo by Alexas_Fotos

낮잠을 자느라 거북이에게 승리를 빼앗긴 어리석은 토끼는 현실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환호와 축하는 늘 멋있고, 강하고, 유능한 자들의 것. 아직 완주하지 못한 이들이 남아있는데도, 승자가 결정되고 나면 시합은 막을 내린다. 동정심이 아닌 이상, 패자의 뒤늦은 등장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러기엔, 다들 자기자신의 상황은 너무 열악하고, 현실은 손끝이 무감각해질 정도로 냉담할 때가 많다. 염세주의자처럼 장황한 말들을 늘어놨지만, 딱히 ‘그건 아니잖아!’ 외치면서 반박할 만한 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패배의 원인을 오롯이 패자 개인의 이유로 돌리고 나면, 모든 설명이 수월해진다. 우리는 그저 승자를 본받고 패자를 경멸하기만 하면 된다. 삶은 지독하리만치 단순한 논리를 지닌 설명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누구나 패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난 절대 지지 않아’ UFC 챔피언이나 내뱉을 법한 말을 함부로 늘어놓을 수도 없다. 사실 그 말은 확신이라기 보다는 다짐에 가깝다.

 

photo by Hans

다수의 패와 소수의 승

 

누구에게나 승리와 패배의 순간은 온다. 그리고 굳이 확률적으로 따져보면, 당연히 패배의 순간이 훨씬 많다. 그러니, 승리에 대해서만 몰두하는 것은 존재 본연의 속성을 회피하려는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패배가 더 익숙한 존재들인데, 승리해야만 한다고 말을 하다니. 승리의 가치를 지난 패배의 노력에서 찾지 않고 승리라는 결과에서 찾으려고 하다니. 그런 방식의 ‘승리 찬양’이 계속 될수록, 우리는 더욱 불안해질 뿐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패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고방식이 계속 될수록,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다윗이 이기지 못했다면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속담을 듣고 바위가 깨졌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photo by Agnli

계란이 바위를 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윗이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는, 도저히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에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진짜 의미는, 계란이 자기 생을 걸고 바위를 더럽혔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적어도 무력할지언정, 무기력하지 않았다.

달콤한 승리는 얻지 못하면서,  쓰라린 패배를 위로하고 정당화하려는 못난 짓거리를 비웃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정신 승리’ 한다고, 그냥 찌그러져 있으라고. 하지만, 사람이라면 울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어야만 하는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 소용 없음을 알면서도 소용 없음에서 멈출 수 없는 그런 때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도 알고, 저 스스로가 바위가 아닌 계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달리게 되는 그런 때가.

무력할지언정 무기력할 수는 없다고, 벼랑인 걸 알아도 멈출 수는 없다고.

그럴 때, 비로소 겨우 저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사람이구나, 그래도 살아 숨쉬는 사람이구나, 울먹이면서 안도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패배를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는 박수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