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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kantukan studio

대학로의 약간은 구석진 공간. 다 불타버렸던 3층짜리 건물. 중국인 유학생이 살다가 불에 타는 바람에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던, 그래서 귀신 들렸다며 버려졌던 그 건물이, 요즘 다시 태어났다. 극단 <연희단 거리패>가 창단 30주년을 기념해 건물을 통째로 리모델링해 극장, 연습실, 카페를 갖춘 다목적 스튜디오인 <30스튜디오>를 개관한 것이다. 한 극단이 30년동안 유의미한 연극 작업을 해 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전용 스튜디오를 갖추고 후배 연극인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부산 밀양 지역에서는 <밀양연극제>를 통해 지역 기반 축제까지 기획하는 등 <연희단 거리패>는 한국 연극계의 기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30주년 극단 <연희단 거리패>의 기둥이라면, 단연 연출가 이윤택(李潤澤, 1952년 7월 9일~ )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이룩한 <연희단 거리패>의 역사는 거의 한국 연극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연출가 이윤택 역시 처음부터 한국 연극의 거목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연극 인생은 1972년 서울 연극 학교에 들어가면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동랑 유치진이 세운 드라마센터의 전신인 이 학교는 학장 유덕형, 교수 오태석, 발성은 할리우드 배우인 오순택이 담당하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예술학교였다. 그리고 이때 동랑 유치진은 수업 때 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방학이면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지역을 위한 연극을 하라고 독려했다. 이윤택은 이 말을 듣고 열의에 차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연극 2편을 제작하고, 주연을 맡고, 연출을 한다.

 

photo by pixabay

그리고 결과는, 참담한 흥행 실패였다.

문제는 이때 너무 돈을 까먹어서 서울 연극 학교의 학비마저 낼 돈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윤택은 당시 극장 대관비를 낼 돈조차 없어 분장도 다 지우지 못한 채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얼마 안 가 군대로 도피하듯 입영한 그는 나중에 결국 극장 주인이 어머니에게 와서 대관비를 받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이윤택은 결심하고 친구들과 다짐을 하나 한다.

“그때 가면서 친구들에게 말했어요. “이제 10년 후에 만나자.” 20대의 불 같은 정열, 연극과 글쓰기에 대한 정열만 가지고 사람이 살아갈 수 없구나, 결국은 현실이라는 무기가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같이 연극 했던 친구들에게 “10년 후에 우리가 현실에 제대로 발을 딛고 설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서 연극을 하자” 그렇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죠.”

잠시 현실을 살기 위해 연극을 떠나자, 그리고 10년 후에 연극으로 다시 만나자,는 약속.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이윤택 역시 군대를 다녀온 후 10년간 13가지 직업을 전전하게 된다. 현암사 도서 외판원, 5급(지금의 9급)공무원 시험을 치고서 우체국에서 근무, 한일합섬 공장의 염색기사, 한국 전력 직원, 부산 감천 화력발전소 사무원, 등등… 마지막엔 부산일보 신문 기자 생활을 6년 가량 했다.

 

photo by pixabay

이윤택은 자신의 다짐처럼 정말 충실히 사회인으로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1979년에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부마 항쟁 등의 역사적 격동기 동안, 그는 신문기자로서 현실을 살아내고 직시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그리고 신문기자로서의 생활을 남부럽지 않게 영위하고 있던 1986년 1월 4일,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살. 그는 정말로 돌연 사표를 내던진다. 이유는 10여 년 전, 다짐했듯이 ‘연극을 하기 위해서’ 였다. 사표는 돌고 돌아 사장까지 올라갔고 모두가 그의 사직을 반려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변함이 없었고, 그의 연극은 그렇게 10년 만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그렇게 다시 연극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서양 연극, 일본 연극과는 다른 정말 ‘우리의 연극’을 찾기 위해 자신이 한국 연극의 원형으로 생각했던 ‘굿’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제작 아래에 무대 위로 ‘동해안 별신굿’, ‘진도 씻김굿’ 등이 올라갔다. 그 첫 번째 결실을 맺었던 연극 <산씻김>은 그 미스테리함과 괴기함, 파격적인 스타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동해안 별신굿으로 한국인의 초상집을 해학적이고 유쾌하게 풀어낸 <오구>로 일본과 독일에까지 초청돼 공연을 한다. 한편으로는 신문기자 시절의 경험을 통해 동아일보 해직 기자의 이야기를 <시민K> 라는 작품으로 올려 시대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았다는 평가와 함께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photo by pixabay

연극을 하면서 한번 그만 두었던, 거기에 10년이 넘게 직장 생활을 해 오던 사람이,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화려하게 비상한 것이다.

그런 그의 행보는 한국 연극계의 하나의 모범이자 귀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극단 <연희단 거리패>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고, 자신들의 터전을 밀양연극촌, 부산 가마골 소극장, 서울 30스튜디오에 각각 마련했다. 게다가 발전적인 창작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연극계 후배들을 위한 사업에도 아낌이 없으며, 밀양 연극제를 통해 지역 사회에 성공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우리 연극 찾기’ 라는 연구도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더 모범적일 수가 있을까. 그는 최근에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연극인들이 세웠던 ‘광화문 천막 극장’ 에도 후배들과 함께 공연을 올리며 여전히 현역임을,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극인임을 증명했다.

그런 그에게 연극이란 무엇일까. 연극이 무엇이기에 그는 10년의 공백과 사회생활을 다 저버리고도 다시 연극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photo by pixabay

예술감독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 http://www.stt1986.com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당신은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시는 외로울 때 쓰는 건데 나는 연극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대답했어요. 시는 혼자서 쓰는 것이지만 연극은 만나야 하는 것이니까요. 많은 젊은이들에게 말해요.

‘‘연극을 해라.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극을 하면 이웃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의 연극은 지금도, 그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글.프리터.김동욱